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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타락과 세 영웅들 - 제임스 B. 조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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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타락과 세 영웅들 - 제임스 B. 조르단

2022. 7. 1. 23:30

세 타락과 세 영웅들

(Three Falls and Three Heroes)

 

 

James B. Jordan

강희현 역

 

 

 

성경은 하나님께서 지구를 창조하실 때 삶의 세 구역을 정하셨다고 말해준다. 첫 번째는 세계 그 자체였다. 두 번째는 에덴의 거룩한 땅이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성소, 에덴의 정원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모든 나무는 인간의 음식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예외 없이 모든 나무를 말이다(창 1:29. 그러나 일찍이 하나님은 (이브가 만들어지기 전) 아담에게 그들이 선악의 지식을 알게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다(창 2:17). 이 두 가지 사실로부터, 그들은 이 금지가 단지 일시적인 것임을 쉽게 추론할 수 있었다. 지식의 나무는 그들이 준비가 되었을 때 주어질 것이다. 그동안, 그들은 인내를 발휘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인내의 믿음을 나타내지 못했고 아담과 이브는 정원의 성소로부터 쫓겨났다.

 

 

이것은 인류 최초의 죄악이었고, 성소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언급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타락이 아니었다. 신학적으로 “타락”은 아담이 정원에서 타락한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타락”은 다른 두 개의 “타락”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첫 번째로 외적인 것과 사람의 결정적인 타락을 보여준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두 번째 타락을 보여준다. 가인은 그의 형제를 죽인 뒤, 거룩한 땅인 에덴의 땅에서 떠돌이의 땅으로 쫓겨났다. 이것은 그 땅의 형제와의 관계에 대한 언급과 함께 타락한 것이었다. 가인의 후손들은 칼의 힘으로 형제를 살인한 죄를 억압의 죄로 성숙시켰다(창 4).

 

 

인류의 세 번째 타락은 창세기 5:1-6:8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창세기 내의 문학적 단위이다(cp. 5:1; 6:9). 여기서 우리는 셋 계통의의 타락을 볼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창세기 6:1-2의 혼인을 천사들이 남자와 결혼하는 것에 대한 언급으로 보지만, 그러한 해석은 셋 계보의 기록에 대한 사건의 맥락을 설명하지 못한다. 마태복음 22:30도 참고하라. 만일 창세기 6:1-2이 셋 후손의 타락을 기록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겠는가? 셋의 후손들은 혼인의 죄악에 빠졌다. 그들은 가인 자손을 목격하는 대신 그들과 합류했다. 그 결과, 그들은 홍수로 인해 세계로부터 쫓겨났다. 이것은 신자와 불신자의 관계에 대한 언급과 함께 타락한 것이었다.

 

 

구약성경의 역사(Old Testament History)

구약성서 역사 전체가 이와 같은 세 단계의 이동과 같은 “모호한” 방식을 보여준다는 점을 고려할 때 매우 흥미롭다. 먼저 사사기의 역사를 고려하라.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반복적으로 다른 신들에 대한 숭배 속에 빠져들면서, 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보인다. 그 결과, 그들은 성소, 성막(삼상 4장)을 잃게 된다. 하느님은 신명기 17장에서 그들에게 마침내 왕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인내하지 못했고,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기 전에 왕을 요구했다(삿 8:22; 9:1-57; 11:9; 21:25; 삼상 8).

 

열왕기서의 다음 역사를 고려해보자. 여기서 북이스라엘과 남이스라엘이 갈라져 계속되는 긴장 속에서 사는 것이 형제간의 관계이다. 이 기간이 끝나면, 그들의 죄 때문에, 이스라엘은 거룩한 땅에서 쫓겨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포로기 이후 혹은 더 나은 회복의 기간을 볼 수 있다. 여기서 결혼은 에스라, 느헤미야, 말라기에서 볼 수 있는 문제로서 표면화된다. 이스라엘은 혼인의 타협이 없이 이 세계의 황제들 앞에서 증언하며 여러 나라 사이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옛 세계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함으로, 새 언약 안에서 새 창조물로 대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울 왕의 세 번의 타락을 비교해 보라. 사무엘상 13장에서, 사울은 하나님을 인내하지 못하고, 희생제물을 바칠 특권을 조급히 쟁취하여, 하나님을 잘못 예배한다. 사무엘상 14장에서 사울은 그의 형제들을 대항하여 공격하고, 요나단을 죽이려고 찾는다. 사울은 사무엘상 15장에서 하나님의 대적 불신자 아말렉 사람과 타협한다.

 

또한, 기드온에서 삼손까지의 사사기의 점진성을 비교해 보라. 기드온 이야기의 초기 부분은 우상숭배(삿 6:1-8:27)에 관한 것이지만, 후반부는 에브라임이 그를 반대하고, 그의 아들 아비멜렉이 왕이 되었을 때, 동족상잔(8:1-3; 9:1-57)으로 이동한다. 입다의 이야기는 입다의 형제들이 그를 억압하는 것과 또한 그가 에브라임(삿 11-12)을 상대해야 하는 것과 같이, 입다의 형제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마지막으로 삼손의 이야기는 삼손이 블레셋 처녀에게 신성한 혼인을 제의한 것(삼손이 적과 죄에 빠진 것; 삿 16)의 반대라는 점에서 전개된다.

 

창세기 책에서 우리는 이 세 가지 죄악의 경향으로 볼 때, 죄악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보여주는 세 명의 영웅을 발견한다. 창세기는 “이들은 X의 계보들”이라는 문구로 표시된 명확하게 정의된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창세기 11:27-25:18에 있다. 야곱의 이야기는 창세기 25:19–37:1에서 발견된다. 요셉의 이야기는 창세기 37:2–50:26에 있다. 이삭에게만 독점적으로 해당하는 문학적 섹션은 없다. 그의 이야기는 아브라함과 야곱의 이야기와 연관되어 있다.

 

넓게 말해서, 우리는 요셉이 이집트에서 그의 삶이 진행되면서, 신자와 불신자와의 관계에 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야곱은 에서와 씨름하면서 형제간의 관계를 염려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홀로 교감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심을 갖는다. 물론 세 가지 주제가 모두 사례별로 존재하지만, 그러나 초점은 전환된다.

 

 

아브라함(abraham)

비록 제단-우물-나무의 “오아시스 성소”의 일시적 성격은 성소가 아직 땅으로 복원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성소의 창조는 아브라함의 삶에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창 12:7, 8; 13:4, 18; 21:22-34; 22:9) 아브라함은 예배할 때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것으로 묘사된다. 아브라함이 (하갈과 함께) 조급하게 금지된 과일을 거머쥐긴 했지만, 하나님께서 약속된 아들(히 6:12-15)을 기다리시게 하시므로 그의 삶의 주요 주제는 인내이다.

 

아브라함의 삶의 초점과 아담의 몰락의 초점은 아버지 하나님께 있다. 아브라함은 인간의 아버지로서 탁월한 존재로 등장하고, 이는 그가 아버지 하나님과 접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일곱 번이나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매번 솔선수범하셨고, 그때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다(창 12:1-4, 13:14-18, 15:1-21, 17:1-27, 18:1-33, 21:12-14, 22:1-19). 하나님의 성소에서 살고, 아버지의 참된 아들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아브라함 이야기에는 약속된 씨와 희생의 역할을 했던 이삭의 초기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여기서 또한 제사장적, 성소적 초점이 돋보인다.

 

 

 

야곱(Jacob)

야곱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군대의 일원이 되는 것에 주목을 받는다. 많은 주석가들과 대조적으로, 성경은 우리에게 야곱이 초기부터 “완벽한”(perfect) 사람이었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성취한다: “나의 앞을 걷고, 완전하라”(17:1). 창세기 25장 27절은 야곱이 “완벽한”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비록 주석가들은 그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하며, 이것을 “부드러운” 또는 “평화로운”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내 앞을 걷고, 부드러워라”라고 하셨는가?

 

야곱은 태중에서도 중생하지 않은 에서와 씨름하며, 삶의 초기 단계부터 하나님 편에 섰다! 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경멸했지만, 야곱은 그것을 사랑했다(창 25:28-34—본문에서 비난받는 사람은 야곱이 아니라, 에서임을 주목하라). 야곱은 그의 형제 에서와 씨름을 해야 할 뿐 아니라, 야곱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계명을 좌절시키기로 작정한 아버지 이삭과도 씨름해야 했다. 낯선 땅에서 야곱은 자신을 속인 친척 라반과 씨름했다.

 

그러므로 죄악된 형제들과 씨름하는 것은 야곱의 삶에서 중요한 주제이다. 아벨은 가인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야곱은 라반과 에서에게 살해당하지 않는 방법을 배운다. 그리스도인들은 야곱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에 대해 언제나 의견이 엇갈리겠지만(아마도 아브라함처럼) 우리는 전체적인 주제에 대해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죄악된 형제들과 씨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하게 하시려고 주신 것이다. 야곱이 브니엘에서 이것을 발견했다. 틀림없이, 야곱이 어둠 속에서 공격을 받았을 때, 그는 처음에 라반이 자기를 찾으러 돌아왔다고 생각하거나, 에서가 자기를 찾으러 왔다고 생각하거나, 눈이 먼 이삭이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야곱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야곱을 거룩한 사자의 전사로 훈련시키기 위해, 야곱과 씨름하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으로 판명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가치 있는 씨름 선수가 되었다는 신호로서, 야곱이 자신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게 됨을 기뻐하셨다(28).

 

야곱의 역사 속에서만, 하나님의 천사적인 사자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28:12; 31:1)로 하나님의 사자의 주제는 강화된다. 그것은 그 사자의 대장이신 주님의 천사, 아들이시다. 또한, 아브라함과 다르게, 야곱과 그의 가족은 종종 기도할 때 하나님과 씨름을 시작하는 것으로 묘사된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29:33; 30:22; 32:9-12).

 

야곱의 삶에서 주목할 초점은 아들 하나님이다. 악과 씨름하고, 섭리적으로 악에게 보내셔서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씨름하여 우리를 강하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아들의 참된 형제가 되는 것을 뜻한다. 결과적으로, 야곱은 아브라함이 찾았던 성소의 땅으로서 거룩한 땅을 샀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 땅은 아직 하나님의 백성에게 완전히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그 땅을 차지한 것은 그저 일시적일 뿐이었다.

 

 

 

요셉(Joseph)

마침내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로 왔다. 하나님은 결코 요셉과 대화를 시작하지 않으시고, 우리는 요셉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볼 수도 없다(비록 그가 기도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관심의 전면에 있는 것은 신자-불신자의 관계이다. 셋의 아들들은 성령(창 6:3)에 저항했지만, 요셉은 성령(창 41:38,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영이 누구냐”는 뜻)에게 항복했다. 제단도 땅도 요셉의 이야기에는 핵심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 그 자체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라면 말이다.

 

만일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인내가 중요하고, 야곱에게 아들 하나님 옆에서 씨름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성령의 사람 요셉에게 중요한 것은 타인에 대한 섬김이다. 요셉이 영광스러운 채색옷을 입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에 대한 훌륭한 섬김 때문이었고, 부러웠던 형제들이 요셉에게서 이 옷을 벗겼다(37:3, 23장). 요셉은 보디발을 훌륭하게 섬겼기 때문에, 다시 겉옷을 입었지만,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에게서 이 옷을 벗겼다(창 39:12~18), 결국, 요셉이 이집트 전 세계를 통치하는 권위의 옷을 받은 것은 바로에 대한 훌륭한 섬김 때문이었다(창 41:42).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을 받았지만, 셋의 아들과는 달리 혼인(intermarriage)의 유혹을 물리쳤다. 그는 불신자들과의 관계에서 의롭게 지냈고, 이로 인해 그들은 그의 지도력을 받아들였다. 사실, 이 본문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바로와 그의 모든 백성이 요셉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으로 참되게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축복하고, 그들의 행복한 섭리에 기뻐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바로가 무릎을 꿇고 야곱의 축복을 청하는 것을 본다(창 47:10). 따라서, 요셉이 결국 애굽 여성과 결혼했다면, 그것은 이집트가 개종한 후였다(창 41:38-45; 위 38절 참조).

 

하나님의 성령께서 다스리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불신자의 세계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요셉의 이야기가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요셉은 섬길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죄를 지을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한 섬김은 그가 바로와 전 세계에 대체된 “빵 굽는 관원”과 “술 따르는 관원”이 된 것의 유형이다(40; 41:9-13, 46-49; 44:2). 요셉은 빵과 포도주, 즉 왕의 음식을 온 세상에 내놓았다! (41:57; 42:2 참조) 그러나 아브라함과 야곱과 마찬가지로 이 상태는 얼마 견디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성도들에게 이 세상을 주시지 않았다.

 

 

 

족장 이야기의 요약(Summary of the Patriarchs)

세 아들은 다음과 같다: 이삭, 야곱, 요셉. 그들은 삶의 세 영역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준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는 행동의 장소가 성소이고, 의무는 지키는 것이며, 죄는 신성모독(하나님에게서 훔침)이며, 제사장적 차원의 희생제사에 초점을 맞춘다. 사회적 용어로, 이곳은 교회의 영역이다.

 

야곱의 이야기는 행동의 장소는 땅이고, 의무는 통치이며, 죄는 동족상잔과 억압이며, 하나님과 씨름하는 왕적인 차원에 초점을 맞춘다. 사회적 용어로, 이곳은 국가의 영역이다.

 

요셉 이야기는 행동의 장소가 세계이고, 의무는 봉사와 조언이며, 죄는 혼인(intermarriage)이며, 선지자적 차원에 초점을 맞춘다. 사회적 용어로, 이곳은 선교와 섬김의 영역이다.

 

 

 

예수님(Jesus)

우리는 이 간단한 연구를 계속해 나갈 수 있다. 우리 주님께서 이런 유형을 성취하신 것을 생각하면 된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아들들이 누리는 모든 것을 성취한 아들이기 때문이다. 사탄과 맞닥뜨린 광야에서 예수도 이 세 영역의 시험을 받으셨다. 우리는 이것을 두 가지 측면에서 고려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고 궁극적인 죄와 악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씨름 선수로서 그리스도와 야곱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야곱은 처음에 에서와 씨름해야 했고, 에서의 음식은 죄악된 눈먼 이삭이 선호했다. 이처럼, 예수님도 처음에 돌을 빵으로 바꾸는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야곱은 죄악된 이삭과 씨름해야 했는데, 이삭은 에서를 다른 모든 이보다 높게 세우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27:29). 이처럼, 예수님은 두 번째로 성전 꼭대기에서 자신을 던지라는 유혹을 받으셨다. 그리고 회복하셨다. 마지막으로, 야곱은 그의 통치권와 부유함을 막기로 결심했던 라반과 씨름해야 했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탄의 손에서 세상의 모든 민족을 받으시려는 유혹을 받으셨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사람을 먹이고, 사람에게 경배(높임)를 받으시고, 사람을 다스리러 오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사탄에게서 받지 않으시고, 오직 아버지께만 받으실 것이다. 야곱이 세 번의 씨름을 마치고 그 땅으로 돌아온 뒤 천사들을 만난 것처럼(창 32:1), 예수님도 사탄과 씨름을 마치고 땅으로 돌아오실 때(마 4:11) 천사들을 만나셨다.

 

둘째, 예수님은 참되신 족장으로서, 요셉, 야곱, 아브라함의 삶의 의미를 이루셨다. 요셉의 삶에 집중된 것은 배고픈 세상에 빵을 먹이는 것이었다. 사탄은 예수님에게 같은 행동을 하도록 유혹했다. 야곱의 삶에 날카롭게 초점을 맞춘 것은 씨름 경기에서 누가 승리할 것인가의 문제였고, 과연 하나님의 승리하는 사자의 일원으로 부상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사탄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절함으로써, 천사의 주인이며, 그들의 우두머리로 믿도록 유혹했다. 아브라함의 삶에 날카롭게 초점을 맞춘 것은 그가 오직 하나님을 경배하면 많은 나라의 아버지이자 세계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사탄은 자신을 예배함으로써, 예수님이 자신에게서 온 세상을 받으라고 유혹했다.

 

아버지는 이제 예수께서 사탄의 손으로부터 거절한 왕국을 주셨다. 우리는 주님과 연합하여 왕국을 소유했고, 세상을 그곳으로 인도하도록 위임을 받았다. 창세기 세 영웅의 삶 속에서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하는지의 모델들을 볼 수 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을 전파하여 우리가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아버지 앞에서의 “인내”와 “순종”임을 보게 된다. 즉, 조급함, 불순종, 우상숭배는 효과가 없을 것이다.

 

야곱으로부터 우리는 아들의 옆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씨름하는 것이 마침내 이삭, 라반,에서, 이스라엘과의 평화를 가져온 것을 볼 수 있다. 즉, 기도 대신 폭력을 통한 씨름은 효과가 없을 것이다.

 

요셉으로부터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진정한 섬김임을 알게 된다. 타협은 효과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을 수 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우리는 야곱의 복을 받을 수 있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부유함을 베푸시기를 원하며”

 

그리고 우리는 요셉의 복을 받을 수 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세상에 평화를 주시기 원하노라”(민 6:24-2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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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로교회의 교역자, 역사적 개혁주의 장로교회 회복에 관심이 많음. 양질의 글만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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