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투사 메이첸
20세기 초, 프린스턴 신학교와 미국장로교회(PCUSA)는 타협의 거센 광풍을 맞이하고 있었다. 소위 통일, 화합, 관용이라는 명분으로 당시 신학적으로 가장 보수적이었던 “미국 장로교회”(PCUSA)가 현대주의(자유주의)에 대한 포용을 요구하는 강력한 기류(氣流)였다. 이 기류 속에는 “에머슨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의 자유주의적인 설교를 시작으로, “어번 선언”(The Auburn Affirmation), “어드만과 메이첸의 논쟁” 등 수많은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들의 핵심은 미국 장로교회(PCUSA) 총회가 1910년에 결의했던, ‘근본주의 5대 강령’으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성경의 무오성,
2)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3)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
4) 예수님의 기적의 역사성,
5)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이거 뭐 당연한 것 아닌가?”라는 의문을 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미국 장로교회에서 “이 다섯 강령을 온전히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는 당시 중대한 문제였다. 물론, 1910년에 총회가 이 강령을 결의했기 때문에, 그 당시만 해도 상당수는 이에 대해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이 논쟁이 거의 20년 가까이 계속됐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언제나 논쟁은 길어질수록 본질이 흐려지기 마련이며, “그냥 은혜롭게 합시다.”라는 구호가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간간이 스치기 때문이다.
결국, 1926년 총회를 기점으로, 미국 장로교회는 점차 타협의 광풍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특히, 1924년 1월 9일, “미국 장로교회의 통일과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선언”(An affirmation Designed to Safeguard the unity and Liberty of the PCUSA)이라는 장로교 목사 150명의 성명서가 발표됐다. 여기서, “통일”과 “자유”, 얼마나 좋은 말인가? 마스덴(Marsden)의 견해처럼, “대부분의 미국 개신교 신자들은 현대주의도 아니고 급진적인 근본주의도 아니었기 때문에 평화와 관용을 위한 제안들은 상당한 지지를 얻을 수 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타협의 광풍 속에서도 끝까지 신념을 굽히지 않는 “강단”(剛斷)을 보여준 인물이 바로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이다. 그는 이러한 논쟁 속에서 『기독교와 자유주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총회에서도 온갖 비난과 공격을 받았지만, 현대주의에 저항하는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훗날, 미국 장로교회 총회가 프린스턴 신학교의 재편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을 때, 결국, 그는 프린스턴을 떠나기로 결단한다. 1929년 세인트 폴(St. Paul) 총회에서 그는 떠나기 전 아래와 같은 마지막 발언을 했다.
“프린스턴 신학교에 있는 우리는 인기 없는 복음을 전해왔습니다. 이 복음은 현대의 경향 전반에 반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부끄러워하지 않는 복음입니다. ...(중략)... 기존의 프린스턴이 사라진다면, 자신들의 삶에서 빛도 꺼져 버렸다고 생각할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여러분한테서 그 빛이 꺼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프린스턴을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 놓은 이사회를 파괴함으로써, 오늘 기존의 프린스턴을 파괴한다면, 기뻐할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저는 인정합니다. 오래된 복음과 오래된 성경은 시대에 뒤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총회장님, 만일 기뻐할 사람이 많이 있다면, 슬퍼할 사람들도 있습니다.”
얼마 후, 메이첸은 프린스턴을 사직하고, 오늘날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했으며, 이 신학교와 맥락을 함께 이어오는 교단이 바로 “정통장로교회”(OPC)이다. 물론, 이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 장로교회의 거두였던 박형룡, 박윤선 박사가 이 학교에서 수학했으며, 두 분 모두 메이첸의 제자였다. 그래서, 사실 한국 장로교회 신자들이 “근본주의 5대 강령”을 보고도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메이첸의 영향을 깊숙이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국의 투사 메이첸
메이첸은 과거 프린스턴의 신약학 교수로 재직했지만, 그에게는 남다른 애국심도 있었다. 당시, 유럽은 비극적인 “1차 세계 대전”(1914-1918)을 맞이했는데, 메이첸은 비록 유럽의 전쟁이라 할지라도 이에 무관심하지 않았다. 본래, 미국은 1차 세계 대전에 대한 중립적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독일이 무차별적 공격을 발표하자, 상황은 돌변했다. 이때, 대다수의 미국인은 독일에 대한 강한 증오의 감정, 특히 반(反)-독일 운동과 수많은 교회와 기관을 향해 “완전한 미국 정신”(Americanism)을 증명하라는 압력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마스덴은 “어떤 독일어에 대해서도 미국의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고, 독일어의 가르침이 일부 공립학교에서는 금지되었으며, 많은 곳에서는 영어 이외의 언어로 된 교회의 예배도 불충분한 애국심의 증거로 여겨졌다.”라고 당시의 격렬한 분위기를 묘사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 속에 메이첸은 영국과 독일 중에 어느 편도 들지 않았다. 물론, 과거 독일에서 보낸 유학 생활의 영향일 수 있겠으나, 그는 무엇이 진정으로 미국에게 장기적인 유익과 평화를 줄 수 있는가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그 당시 윌슨 대통령이 강제적인 징병 정책을 펼쳤을 때, 이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 왜냐하면, 그는 비록 전시 상황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정책이 자유를 억압하는 영구적인 정책으로 변질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4월 2일, 뉴저지의 위원들에게 아래와 같은 편지를 보냈다.
“요컨대 미국 정신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미국의 자유와 삶에 대한 총체적인 이상 말입니다. 제안된 정책 변경에 전혀 관계가 없는 비상사태라는 부자연스러운 압박 하에서 미국 정신을 심사숙고하지 않고 버려야만 하겠습니까? 다른 나라들이 현 전쟁이 군비 축소와 자유의 확장으로 귀착되기를 바라고 있는 바로 이때, 미국은 맨 먼저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급진적인 조치를 해야만 하겠습니까?”
이처럼, 메이첸은 진정한 미국 정신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혜안(慧眼)을 가지고 있었었다. 그래서, 얼마 후 미국이 1차 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여했을 때, 그는 자신의 교수직을 내려놓고 어떻게 해서든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자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1918년 1월, 그는 YMCA의 간사로 해외 작전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의 초기 임무는 핫초코를 시중들고 병사들에게 담배 제품, 사탕, 과자를 판매하는 것이었다!
메이첸은 연합국 진영에 해당하는 프랑스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전선에서 폭탄과 총알이 날아오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임무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큰 위험에 노출되었는지는 아래의 편지에서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저녁에 저는 ‘대피소’(abri)로 내려와서 한 시간 정도 잠을 잤습니다. 새벽 1시에 격렬한 폭격이 시작되었고, 많은 부사관이 주거지 안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남은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그 폭격은 우리가 이전에 경험했던 그 어떤 것보다도 훨씬 뛰어났습니다. 폭탄은 주변뿐만 아니라 마을에서도 바로 덮쳤습니다. 우리 숙영지에서 몇백 야드 떨어진 곳에 있던 한 사람이 죽었는데, 그 사람은 숙영지 사람이 아니라 길을 지나던 군인이었습니다. 폭격 초기에는 가스가 약간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더 치명적인 종류의 가스 대신에 ‘최루탄’(lacrymogene)의 일종이었습니다. 밖에서 온 사람들이 그곳 상황이 더 나쁘다고 보고하기 전까지는 그저 (최루탄의 영향으로) ‘콧물을 훌쩍이는’ 정도의 공격을 받았을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문틈에 끼인 채 최소한 한두 번은 방독면을 썼습니다. 부사관 중 한 명은 친절하게도 내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작은 것보다, 더 좋은 방독면을 주었습니다. 다행히 가스는 계속되지 않았고, 내가 경험한 그 가스는 심지어 불편하다고 부르기조차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누구나 이렇게 전쟁의 비극을 몸소 경험한다면, 적국에 대한 큰 악감정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메이첸은 전쟁 후에도 독일에 대해 악감정을 품지 않았으며, 오히려 독일에 가해진 가혹한 조건에 혀를 찼다. 실제로 아래와 같은 메이첸의 예측처럼, 연합국이 내세웠던 베르사유 조약은 훗날 나치 독일과 아돌프 히틀러의 거대한 복수극으로 돌아오게 되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런 일들(베르사유 조약과 티롤 남부의 정책)이 묵과되거나 칭찬받는 한, 전쟁은 넌더리날 만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오늘날 신학자로서 메이첸을 향한, “편협한 근본주의자”, “분리주의자” 등의 다양한 비판이 쇄도한다. 물론, 그들의 비판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필자는 메이첸의 판단이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실제로 오늘날 미국 장로교회(PCUSA)는 현대주의 노선을 따라, 이제는 공식적으로 동성 결혼을 허용했으며, 스스로 “제3의 성”을 자처하는 사람에게 목사직을 주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만일 메이첸의 “분리”가 없었다면, 오늘날 한국 장로교회는 미국 장로교회(PCUSA)의 전처를 그대로 밟았을 가능성이 매우 컸을 것이다.
또한, 애국자로서 메이첸은 몸소 나라를 위해 전쟁터로 나가기를 회피하지 않았으며, 사사로운 감정이나 선동에 휩쓸리지 않고, 진정 나라를 위해, 자유와 평화를 위해, 올바른 판단과 행동을 서슴지 않았던 사람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1차 대전에 대한 지나친 배상 요구는 나치 독일의 비극을 낳은 하나의 요인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남북 분단의 긴장과 한국교회의 혼란스러운 시국 속에서 선배들의 조언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지금 어떤 판단과 행동이 참된 애국일까? 또한, 무엇이 한국교회를 향한 진정한 사랑일까?
출처: 교회사 이야기: 그레샴 메이첸, 신앙과 애국의 투사 < 논문 < 주장과 논문 < 기사본문 - 코람데오닷컴 (kscoramde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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