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er J. Leihart
강희현 역
야고보서는 신약 학자들에게 오랫동안 어려움을 제공해 왔다. 언뜻 보기에 도덕적인 어조, 신학적인 관심에 대한 명백한 부주의(inattention), 그리고 야고보서의 “행위에 의한 칭의”를 변호하는 것은 모두 주석가들이 다른 신약 성경과 야고보서의 양립성을 구별하는 데에 어려움을 주었다. 루터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의 서신”으로 치부한 것은 많은 학자가 공유하는 태도를 특징적으로 직접 표현한 것에 불과했다.
야고보와 마태복음 사이의 유사점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에게 서신의 성격에 대한 더 정확한 평가를 향하도록 한다. 랄프 마틴(Ralph Martin)의 훌륭한 야고보서 주석에서, 그는 두 책에 공통되는 많은 주제를 열거한다. 나는 단지 몇 가지만을 인용할 것이다: 그것은 “시험 중에 기쁨”(마 5:12; 약 1:2), “완전함”(마 5:48; 약 1:4), “온유함”(마 5:3, 5, 9; 약 3:13, 17-18); “성내는 것”(마 5:22; 약 1:20); “가난한 자”(마 5:3, 25:35; 약 2:5, 16)이다.
더욱이, 몇몇 구절에서 야고보서는 많은 주석가들이 인정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신학적 지향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야고보서가 성경 신학을 날카롭게 구사하는 방식으로 창세기의 전반부를 암시하는 여러 구절이 있다. 이러한 두 가지 구절들을 논해 보자.
1. 야고보서 1:12-18
야고보서는 두 종류의 유혹에 대한 논의로 시작한다. 1:2-4절에서 야고보는 시련과 갈등 속에서도 독자들이 기뻐하도록 격려한다. 그러한 “유혹”(temptations)은 “인내”와 “완전함”을 가져온다. 이 구절의 배경에는 주께서 그의 백성의 유익을 위해 시련과 갈등으로 일하신다는 야고보의 확신이다.
12-18절에서 야고보는 도덕적 의미에서 “유혹”에 대한 논의로 돌아간다. 이런 의미에서 야고보는 우리가 “내가 하나님께 시험(유혹)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라고 말할 수 없음을 주장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당하고 갈등하는 상황을 주관하시지만, 그분이 죄를 부추긴다고 비난할 수 없다. 야고보에게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정의로운 성품의 단순하고 자명한 함축이다. 우리가 “하나님은 나를 시험(유혹)하신다”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단순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유혹)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유혹)하지 아니하신다.”(13절).
1:14-15절에서, 야고보는 우리가 우리의 외적인 환경이 아니라 우리의 사악한 욕망과 갈망에 이끌려 죄를 짓게 된다고 주장한다. 야고보는 유혹이 죄악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한 비유로 잉태와 출산을 사용한다. 유혹에 빠지면, 욕심이 잉태하고 죄를 낳는다. (이 말씀은 잉태에 대한 여성의 역할을 묘사한다.) 죄는 결국 죽음으로 그 자체를 성취한다. 이미 우리는 에덴에서 이브의 유혹에 대한 희미한 언급을 볼 수 있다: 그녀는 먼저 선악과를 욕망했고, 그 후 그녀의 욕망이 죄를 낳았으며, 그녀의 죄는 죽음으로 이어졌다.
창세기가 이 구절들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17-18절을 조사했을 때 확인되는데, 야고보는 여기서 잉태-출산 이미지(conception-birth imagery)를 계속 발전시키고 있다. 사람은 죄를 낳는다; 반대로 하나님은 ‘죄의 아버지’가 아니라 ‘빛의 아버지’이시다. 이는 명백히 창세기 1장에서 넷째 날 굳건한 등불을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설명이다. 빛을 창조하신 분으로부터 좋은 것만 내려오고, 어둠이 그분에게서 오지 못한다. 그의 모든 사역은 매우 좋았다(very good).
그러나 “빛의 아버지”라는 표현은 어렵다. 만일 야고보가 창조의 설명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하나님과 하늘의 빛깔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은 묘한 방법이다. 빛의 “창조자”, “주님” 또는 “왕자”가 더 기대될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용은 창조주뿐만 아니라 구원자를 가리키며, 보이는 “빛”이라는 관점은 주님의 아들과 딸임을 암시한다. 하늘의 빛이 종종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들의 상징이라는 것을 우리가 떠올릴 때, 이 생각은 더 분명해진다(창 26:4; 단 12:3). 구체적으로, 천상의 등불은 왕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한다. 즉, 야고보의 생각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죄와 죽음을 낳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유혹하지 않으신다;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빛처럼 빛나며 의롭고 왕적인 민족의 아버지이시다. 그의 자녀들은 죽음과 죄가 아니라 빛이다.
17절의 나머지 부분은 주님이 빛의 아버지이시므로, 천체(heavenly bodies)가 그러하듯이 그는 변하지 않으심을 강조한다. 여러 가지 기술적-천문학적 용어를 사용하여, 야고보는 세계가 어둠이나 변화에 영향을 받는 것처럼, 창조주는 영향을 받지 않으심을 가르친다. 태양 빛은 매일 밤 사라지고, 창조물 속에서 하나님은 어둠과 밤을 갈라놓으셨다. 그러나 창조주는 순수하고 영원한 빛이다.
이 ‘출생의 이미지’(birth imagery)는 18절까지 이어진다. 첫째 날 창조를 가져온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창조의 첫 열매로서 그의 백성을 내놓으셨다. 아담적 사람(Adamic man)은 오직 죄와 죽음만을 낳는다; 그러나, 빛의 아버지는 새 창조물을 창조하신다. 그러므로 “빛”과 “첫 열매”는 주께서 재-창조하신(re-created) 백성들을 묘사하는 두 가지 방법이다.
이러한 구절들은 야고보가 도덕적 권고에 있어서 신학적 토대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야고보는 특히 “창조”와 “구원” 사이에 유비(analogy)를 그리면서, “빛의 창조”, 이 두 가지 모두를 사용하는 것은 바울 신학에 매우 근접한 것이다(e.g., 고후 4:6; 5:17).
2. 야고보서 3:7-8
이 서신의 지배적인 주제 중 하나는 적절한 “혀”(tongue)의 사용이다. 3장의 대부분은 혀를 통제하는 권고에 할애된다.
7-8절은 야고보가 성경 신학을 창의적으로 사용한 또 하나의 사례와 함께, 특별히 창세기 앞장들을 보여준다. 7절은 비록 (흥미롭게도 파충류를 포함하는) 창세기의 창조와 야고보의 동물 목록이 다르지만, 창세기 1:26-28에 기록된 통치권에 관한 명백한 인용이다. 두 구절은 모두 하등생물에 대한 인간의 통치권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 인용에서 놀랄만한 반전을 주었다. 그는 계속되는 사역으로서 “통치권 의무”(dominion mandate)를 간주하는 대신, 그것이 완성됐다고 말한다. 하늘과 땅과 바다의 모든 동물이 인간의 굴레 아래에 있게 되었다. 심지어, 독사 같은 “파충류”도 굴복했다. 그러나, 비록 창조의 의무는 완성되었지만, 사람은 아직 자신의 ‘독이 있는 혀’(8절)를 길들이지 못했다.
야고보는 분명히 몇몇 동물들이 길들여지지 않았음을 인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핵심은 그리스도인의 통치권이 갖는 참된 특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자들은 약자들을 자주 지배하지만, 그들 자신의 죄를 통제할 능력이 없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난 그리스도인은 죄의 지배에서 해방되고 거룩함과 의로움 속에서 살 수 있는 부활의 능력을 얻게 된다.. 가장 중요한 통치권은 약자에 대한 지배가 아니라 육체에 대한 지배이다. 야곱은 혀를 통제하는 것이 영적 지배의 주요 표현 중 하나라고 암시한다.
사람의 초기적 통치의 행위는 혀와 관련된다: 동물의 이름을 짓는 것이다. 그의 넘어진 것도 혀와 관련이 있다. 아담은 곁에 서서 뱀이 이브를 유혹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그 후 아담은 하나님께 거짓말을 했다. 그래서, 야고보는 사람의 삶을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의 형상으로서 혀의 위치를 반영하고 있다. “빛의 아버지”는 세상을 존재하게 했다; 사람은 그의 말(words)로 세상을 타락시켰다. 이 모든 것은 창세기 1-3장에 대한 강한 신학적 성찰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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