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들의 이야기: 어떻게 나무의 신학이 성경에 스며드는가
(A Tale of Trees: How Arboreal Theology Pervades the Bible)
Peter J Leihart
강희현 역
복음서는 나무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복음서는 세례요한으로 시작한다. 그는 회개의 복음을 전하며,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라고 경고한다(마 3:10) 과일이 없거나 나쁜 과일이 있는 나무는 잘라내어 불에 태워질 것이다. 예수님은 이 경고를 반복하신다. 나무는 맺는 열매로 알 수 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으며, 후자는 불타게 된다(마 7:17-20).
이러한 나무의 가르침은 일반적인 판단에 관한 경고가 아니다. 요한의 “도끼”에 대한 언급은 우리를 이사야 10장으로 데려간다. 여호와께서는 앗수르를 그의 “막대기”(5,15)와 “도끼”(15)로 유다의 숲을 부수고 자른다(사 10:5–19) 시편 74편에서, 그 성전은 이스라엘의 적들에 의해 파괴된 숲이다. 복음서의 많은 경고처럼 요한과 예수님의 나무 예언은 로마에 의해 한 블록씩 허물어져서 성전에 멸망을 말해준다(마 24:1-2).
나무 이야기는 성 주간(Holy Week) 동안 절정에 이른다. 예수님께서 감람산 숲(grove)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마 21:1), 나뭇가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다(마 21:8). 마치 다윗을 전투로 이끌기 위해 여호와께서 나무들 위로 행진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삼하 5:17-25). 예수님께서는 성전까지 곧장 행진하시고, 하나님의 집을 사찰하시고 청소하신 후에 예루살렘을 떠나 베다니에서 밤을 보내신다. 다음날 아침에,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와 이상한 만남을 가지신다. 그 나무의 열매가 없음을 보시고, 저주하신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마 21:19). 마태의 설명에 따르면,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마 21:19)
마태는 성전 사건을 무화과나무를 나란히 놓는다. 마가 11:12-26에서, 두 에피소드는 고전적인 "마르칸 샌드위치"(Markan sandwich)를 형성한다. 예수님은 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을 청소하신 후, 나무는 시들었다. 마태와 마가는 둘 다 우리가 그 두 이야기 사이의 연관성을 보기를 원하고 있다. 앞선 나무의 경고에서 열쇠가 제공된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오셔서, 성전이 좋은 나무라는 것을 증명할 열매를 찾으신다. 그러나 성전은 기도의 집이 아니라 강도의 아지트(소굴: hideout)이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는 열매 없는 성전에 대한 저주를 상징한다. 즉, 성전을 시들게 할 다가오는 심판(Fire)에 대한 좀 날카로운 경고이다.
그 나무의 죽음(Death of the Tree)
예수님은 좋은 나무이다. 주님은 선한 일을 하셨고, 나병을 깨끗하게 하셨고, 노예로 하는 귀신에게서 건져 내시며, 시들고 병든 사람을 낫게 하셨고, 죽은 사람을 살리셨다, 주의 말씀은 듣는 자에게 영양가 있는 음식이다. 예수님이 광야에 들어가실 때도, 음식이 풍성했다. 예수님의 존재는 광야를 비옥한 들판으로 만든다.
그러나, 거룩한 주간(Holy Week)을 지날 때, 예수님은 다른 분이 되신 것처럼 보인다. 그분은 체포당하고, 시험을 당하며, 고문을 당하셨다. 주님은 더 이상 몸을 치료하지 않으시고 혼자서 고통을 겪으신다. 사탄과 싸우고 마귀를 내쫓은 주님은 어둠의 힘에 의하여 침식되신다. 마침내 주님은 나무에 못 박히셨다(겔 3:13). 마치, 주께서 무화과나무에 선포하신 저주가 주께 되돌아온 것 같다. 열매 맺는 나무이신 예수님께서는 시든 나무가 되신다. 이것은 정확히 일어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기 아들을 율법 아래 태어나게 하셔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원하시려고 율법의 저주에 걸려 죽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저주를 자기 자신에게 내리시므로, 심판이 준비된 나쁜 나무처럼, 온 세상을 찾으셨다.
“열매 맺으신 나무이신 예수님이 시든 나무의 예수님이 되셨다.”
곧 나무에 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예수께서는 죽음의 나무에 매달린 마른 열매로 죽으셨으나, 그 죽음에서 일어나셨다. 주께서 죽으신 후, 아리마대 요셉은 주의 시체를 내려 요셉의 무덤인 동굴에 묻었다. 예수님은 돌과 땅속으로 들어가신다. 그 무덤에서 예수님은 휴면기에 들어간 씨앗이다. 그의 몸의 씨앗은 죽는다. 성 토요일은 그 씨앗이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땅을 뚫고 터질 준비를 하는 “발아의 날”이다(요 12:24).
부활한 나무(Resurrected Tree)
이사야는 이 나무 이야기에서 예수의 부활을 또 다른 순간으로 볼 수 있는 틀을 제공합니다. 앗수르의 도끼는 유다를 뿌리째 뽑아 버립니다. 이새의 그루터기만 남도록 말이다(사 11:1). 앗수르는 마치 다윗과 그의 왕조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 일을 마쳤다. 그러나 이 기약 없는 나무 그루터기에서 가지가 자라나고, 일곱 배나 되는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찬 새 다윗이 가난한 자를 심판하고, 그의 막대기로 땅을 치며, 그의 입김으로 악한 자들을 죽일 것이다(사 11:1–5). 제시의 척박한 뿌리로부터 자라난 그 가지는 "열매를 맺을 것이다."(사 11:1) 메마른 나무였던 예수님은 생명의 나무이신 예수님으로서 무덤에서 나오신다.
나무에 관한 이 이야기는 이해하기가 어렵고 암시적이지만, 이것은 부활로만 끝나지 않는다. 느부갓네살은 그가 큰 키, 풍성한 나뭇잎과 열매를 가진 나무라는 꿈을 꾸었다. 짐승들은 아래 그늘에서 쉬고, 새들은 나뭇가지에 둥지를 틀었다(단 4:10-12). 그 나무는 느부갓네살 제국의 형상이고, 새와 짐승은 바빌론의 열매를 먹고 그의 보호막 아래 사는 나라들의 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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