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내부"
노아의 방주를 머릿속에 떠올려 보자! 아마, “겉모습”은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부”는 좀처럼 상상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노아의 방주를 우리는 흔히 요약된 미디어(영화나 만화)로 쉽게 접해왔으며, 이런 매체들은 보통 그 내부까지 세세하게 묘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방주의 내부도 직접 설계하셨음을 볼 수 있다. 물론, 성경이 말하지는 않아도, 노아는 이 설계대로 방주를 지었을 것이다.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창세기 6:15-16)
여기서 방주의 ‘외부 길이’, “층”, “문”은 문제가 없다. 당연히, 지혜의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사가 걸린 이 방주를 완벽하게 설계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여기에 이상한 점이 있다. 그것은 “창문”이 “위”에 달려있는 것이다!
위에 달린 창문들
창문을 왜 위에 달았을까? 물론, (식수를 위한) 빗물을 받기에 좋은 위치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방주가 3층 구조임을 고려하면, 최소한 층마다 하나씩 있는 게 좋지 않을까? 물론, 방주가 엄청나게 거대해도, 이에 상응하는 수많은 동물이 있다. 최소 수만에 가까운 생명체가 방주 안에서 함께 생활했을 것이다. 즉, 위생적인 측면만을 고려해도, 창문이 더 많이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사실, 현대인들은 무엇이든 “디자인”, “실용성”, “성능”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성경의 사물도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기 일쑤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방주의 설계도는 (물론, 다 고려하셨겠지만), 디자인이나 실용성을 최우선 사항으로 고려한 것은 아니다. 즉, 최상의 디자인과 실용성, 성능을 목표로 내부의 “층수”나 “창문의 위치”를 저렇게 비치하신 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홍수 사건을 계속 읽어가며, 재미있는 사실을 한 가지 발견할 수 있다. 무엇이냐면, 설계에서 방주의 “창문”은 분명 하나였지만, 이 문맥에서는 또 다른 “창문”이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이게 말장난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아주 오묘한 평행 관계가 존재한다.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창세기 7:11-12)
홍수가 시작될 때, “깊음의 샘”이 터지고, “하늘의 창문”이 열린다. 여기서 이 표현들을 잘 그려보면, “하늘의 창문”이 열려서 하늘 위에 물이 들어오고, 또 땅이 터져서 땅 밑에 물도 올라오는 그림이 된다. 즉, “세상”(지구)이라는 “집”에 위아래로 구멍이 뚫려 물들이 침입하는 모습이다. (물론, 과학적으로 그렇다기보다, 성경이 이런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우주로서의 "방주"
우리가 다시 “방주”로 돌아와서, 방주는 위에 “창문”, 밑에 “문”이 있었다. 그리고, “세상”(지구)도 역시 위에 “창문”, 밑에 “샘”이 있었다. 한편, 홍수의 시작은 “세상”에 있는 위아래 문(샘)들이 다 열려서 물이 내부로 들어왔다. 그러나, 방주의 위아래 문들은 전부 닫혔으므로, 방주 내부로는 물이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성경은 방주를 온 세상의 축소판, 곧 "소우주"로 묘사하고 있다. 사실, 하나님의 방주 설계도는 온 세상을 반영한다. 사실, 이에 대한 증거를 성경에서 더 발견할 수 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출애굽기 20:4)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로마서 1:23)
성경은 이 세상을 세 부분으로 나눈다. 곧 “하늘”, “땅”, “바다”(또는 땅속)이다. 물론, 이게 과학적으로 확인된 지구의 모습이나 내부 구조와 충돌하는 내용으로 이해해선 안 된다. 단지, 그 시대의 세계관을 토대로 세상(지구)를 아주 단순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도 과학의 도구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산다면, 세상을 어떻게 묘사하겠는가? 위로 “하늘”, 아래로 “땅”, 그 아래로 “물”, 이보다 단순명료한 설명이 있는가?
따라서, 방주의 3층 구조는 세상의 “하늘”, “땅”, “바다”(땅밑)을 나타낸다. 실제로, 성경은 노아 홍수의 문맥에서 동물을 계속 이렇게 분류한다.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창세기 6:20)
그러므로, 방주의 3층 구조에서 3층은 “새들”, 2층은 “동물과 가축”, 1층은 “기는 모든 것”들이 위치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어쨌든, 방주는 “온 세상의 축소판”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악한 “온 세상”을 멸하시고, 의로운 노아를 위해 “작은 세상”을 만드셔서 그들을 보존하신 것이다.
방주의 3층 구조는 위로는 하늘, 아래로는 땅, 그리고 주로 물과 연관된 땅 아래 영역으로 구분된 세계의 3층 구조와 일치한다(예, 출 20:4; 신 4: 16f1; 롬 1:23), 세 영역에 대한 이 같은 개념은 하늘의 새, 땅의 가축과 짐승, 땅의 기는 것들로 분류되는 방주 안의 동물들을 통해서 더욱 강화되는 것 같다(창 6:7, 20; 7:23; 8:17; 참조 7:14, 21; 8:19).
메러데스 클라인, 하나님 나라의 서막, 294.
오늘날에 적용
...(노아의)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베드로후서 3:20-21)
여기서, 사도 베드로가 노아 홍수의 “물”과 세례의 “물”을 연결한다. 실제로, 노아 홍수의 “물”은 모든 생명체를 멸망시켰다. 하지만, 방주는 물 위에 떠 올랐으며, 장차 노아의 가족들을 아라럇 산으로 인도했고, 결국 그들에게 안식을 제공했다.
이처럼, 이 시대에도 세례의 물에 잠겼으나, 물 위로 떠 오르는 자, 과연 그는 무엇이 달라질까? 이제 “교회의 회원”이 아닌가?
그러므로, 온 세상의 축소판인 방주를 통해, 우리는 교회를 본다. 하나님께서 심판 속에 방주를 통해, 그의 백성을 보존하시듯이, 이 시대에도 악한 세대를 향한 심판으로부터 교회로 우리를 온전히 보존하시고,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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