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여종 "하갈"
롯은 왜 소돔과 고모라를 택했을까? 롯은 그곳을 보며 "여호와의 동산"과 "애굽"을 떠올렸다(13:10). 롯에게 "애굽"은 "여호와의 동산"의 같은 풍요의 도시였다. 아브라함은 기근을 만났을 때도 곧장 애굽에 갔다. 그리고, 원하는 대로 가축과 노비를 넉넉히 얻었다(12:16). 이처럼, 아브라함의 가족에게 애굽은 뭔가 좋은 곳이다. 그곳은 부족함이 없다. 어쩌면, 마음 속 깊이, 그들은 약속된 가나안의 복보다, 애굽의 풍성함을 더 갈망했을 지도 모른다.
사라가 "하갈"을 첩으로 들이는 모습이 이를 어느 정도 반영한다. 그녀는 풍성함의 도시, 애굽의 여인이다.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보다 "애굽"을 더 신뢰한다. 그들이 기근으로 가나안을 떠나 애굽에 갔듯이, 지금은 "자녀 기근"으로 또다시 "애굽"이라는 카드를 의지한다. 그리고, 이 카드는 기묘하게도 결실을 맺고, 하갈은 정말 아이를 가졌다. 기근 중 애굽에서 식량을 얻었듯이 말이다. 하지만, 애굽이라는 이 카드는 항상 문제를 해결하지만, 새로운 문제를 야기한다. 앞선, 애굽에서도 식량을 얻지만 아내를 뺏겼듯이, 여기서도 예외는 아니다. 하갈은 임신하지만, 이것은 결국 새로운 문제를 생산한다.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창세기 16:4.
원어로 보면, "여주인을 멸시하는 눈빛으로 보았다"이다. 그리고, "멸시하다"(qll)라는 동사는 "저주하다" 혹은 "가볍게 여기다"로 번역이 가능하다. 즉, 문맥을 고려할 때, "여주인을 얕잡아 보았다"가 가장 적절한 번역이다. 따라서, 하갈은 본래 "애굽-여종"이지만, 사라에게 없는 아이를 가졌기에, 그녀는 지금 "정-부인" 자리를 탐내고 있다.
"그녀는 여주인을 낮추어 보았다"라는 하갈의 반응은 사라에게 너무나 많은 질투심을 불러일으켜 하나님의 개입이 없었다면 완전한 재앙이 되었을 것이다.
Gordon J. Wenham, Genesis 16–50, Word Biblical Commentary, (Dallas: Word, Incorporated, 1994), 2:8.
사라 vs 하갈
물론, 사라와 하갈의 다툼을 단순한 집안 싸움으로 봐서는 안 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얻고, 큰 민족이 되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로 세워질 언약적 가족이다. 따라서, 하갈이 '정-부인이 될 것인가', '그대로 여종인가'의 문제는 정말 중요하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갈을 '정-부인'으로 인정하면, 그녀의 자식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약속의 후손"으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의 결정은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이 누구를 통해 성취되는가와 연결된 문제이다. 자칫, 그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도 있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창세기 16:6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갈의 신분을 “여종”으로 못 박는다. 사실상, 그는 사라를 두둔했고, 결과적으로 "정-부인"은 사라로 확정됐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창세기 16:6)
여기서 “학대하다”는 “굴복시키다”(be bowed down)로 번역할 수 있다. 문맥상 후자가 더 자연스러럽다. 즉, 사라는 신분 상승을 노렸던 하갈에게 “여종”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각인시키고 있다. 그녀는 하갈을 철저히 굴복시킨다.
첫째 우물: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하갈은 사라에게 굴복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그녀는 광야로 도망쳤다. 그런데, 우물 앞에서 그녀는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기서 “복종하라”는 앞서 본 사라의 “복종시키다”와 같은 어근이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을 굴복시키려는 사라의 행위를 인정하라고 명령한다. 즉, 하나님도 하갈을 “여종”으로 못 박으신다. 어쩌면, 이것은 하갈에게 큰 상처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호와의 사자는 이어서 놀라운 말씀을 선포한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분명히 하갈은 “애굽-여종”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아브라함의 정식 부인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그녀에게도 똑같이 약속하신다. 그래서, 그녀는 그 우물의 이름을 다음과 같이 짓는다. 브엘라해로이! 즉, 애굽 여인이면서 여종인 나도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다!
두 번째 우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하갈은 사라의 여종으로 돌아왔고, 시간이 흘러 이삭이 태어났다. 아브라함이 86세일 때, 이스마엘이 태어났고, 이삭은 100세에 태어났다. 따라서, 이삭이 젖을 떼는 그날에 이스마엘의 나이는 대략 15-16세 정도이다. 즉, 당시 이스마엘이 우리의 생각만큼, “어린아이”는 아니라는 것이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창세기 21:9
이삭의 이름은 “웃음”(shq)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이삭을 “비웃는다”(me-sheq). 사라는 이삭을 낳을 때,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을 것이라고 말했다(21:6). 하지만, 이스마엘은 그를 보고 “웃음”이 아니라, “비웃음”을 한다. 사실, 우리는 그냥 애들 장난으로 치부하기 쉽다. 하지만, 문맥을 고려할 때, 이건 심각한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는 “종”이기 때문이다. 즉, 하갈이 사라에게 복종해야 했듯이, 이스마엘도 이삭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는 이삭을 비방하거나, 장난을 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하갈과 이스마엘은 분명하게 “종”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우리는 “사라-이삭”과 “하갈-이스마엘”에 거대한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 분명히, 둘 다 “아내”(첩)이고 "아들"이다. 하지만, “사라-이삭”과 달리, “하갈-이스마엘”은 "종"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언약적 복"을 유업으로 받을 권리가 없다고 선언하신다. 즉, 그들은 (아담-노아에게 약속된) "번성의 복"을 받아도,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언약적 유업의 복"은 받을 수 없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창세기 21:14-15)
쫓아내라는 사라의 고함(10)에 아브라함은 심히 고민한다(11), 하지만, 그에게는 그들을 지킬 방도가 없다. 그는 하갈-이스마엘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더는 같은 장막 안에 거하도록 허락할 수 없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내보내며, 떡과 물을 한 가죽부대에 넣어줬다. 하지만, 그걸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아브라함도 이제는 그들을 돌볼 방도가 없다.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우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우리는 아브라함이 그들을 돌보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돌보심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다시금 우물을 발견하게 하시고, 그 우물로 말라버린 아브라함의 가죽부대를 채우도록 하신다. 즉, 그들은 (아브라함의) "언약적 복"을 누리지 못해도,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손길과 복은 여전히 계속된다. 여전히 그들 앞에는 "브엘라해로이"가 나타나고 있다.
결론적으로, 하갈의 우물 이야기에서 핵심은 "이방인-종"이다. 하갈과 이스마엘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반드시 "사라-이삭"에게 복종해야 했다. 그리고 복종하지 않을 시, 그들은 쉽게 그 장막에서 추방당했다. 즉, 그들은 아내(첩)-아들이기 이전에, "이방인-종"이다. 실제로, 이 신분은 하갈의 이야기에서 강하게 부각된다.
한편, 하갈-이스마엘이 "이방인-종"으로 불복하여 쫓겨났지만, 하나님은 매번 우물로 그들을 보살피신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말라버린 가죽부대에 물을 가득 채워주신다. 즉, "이방인-종"으로서 "하갈-이스마엘"과 더 이상 아브라함과 함께 할 수 없다. 그를 의지할 수 없다. 그들은 종으로서 "사라-이삭"에게 불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돌보심은 계속된다. 그들을 향한 약속, 번성의 복도 여전히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여기서 작은 소망의 빛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 비록 죄로 인해 추방당한 "이방인-종"들을 와전히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보살피신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또 다른 "브엘라해로이"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더 완전한 "브엘라해로이"를 말이다.
사마리아 여인의 "우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우물)이 되리라”
요한복음 4:13-14
앞서 아브라함은 가죽부대의 말라버릴 물밖에 주지 못했다. 구약의 브엘라해로이는 육신의 갈증을 해소하고, 돌볼 뿐이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이제 새 아브라함이 되시고, 말라버릴 가죽부대가 아니라, 마르지 않는 물을 공급하신다. 또한, 주님은 육신을 돌보는 구약의 우물이 아니라, 육과 영이 영생하는 우물을 허락하신다. 즉, 새 아브라함되시는 예수님이 친히 주시는 신약의 브엘라해로이는 이전보다 더 낫고, 이전보다 더 완전하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한복음 4:20-21
당시,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서로 상종하지 않았다(4:9). 사마리아인은 "사마리아 산"에서, 유대인은 "예루살렘 산"에서 예배했다. 그들은 지금껏 하나가 될 수 없었다. 실제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예루살렘 산에 있고, 사마리아에는 없었다(4:22). 즉, 예루살렘은 "사라-이삭"이었고, 사마리아는 "하갈-이스마엘"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시금 우물 앞에서 그 여인을 초대하신다. 사실, 하갈도 첫 우물에서는 아브라함의 장막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둘째 우물에서는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새 아브라함이신 예수님은 또 다시 우물 앞에서 "그리스도의 장막"(신약의 교회)으로 그녀를 초대하신다. 심지어, 이 초대는 "이방인-종"으로서 그들을 부르심이 아니라,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아들-딸"로 부르심이다.
오늘날에 적용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 4:30-5:1
우리 주님의 우물은 완전한 구약의 성취로서, 영생하는 생수를 공급하신다. 그 여인을 종에서 해방하샜고, 참 자유자가 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제 “하갈-이스마엘"이 없으며, 모두가 "사라-이삭"이 된다. 누구는 자유자로, 누구는 종으로 치부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는 하나님의 완전한 자녀이며, 모든 교회가 완전한 아내가 된다.
실제로, 지금 우리의 "대한민국"은 구약의 이스라엘이 아니고, 혈통도 유대인이 아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생물학적 혈통이 아니다. 구약의 시점으로 우리는 절대 언약적 복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정-부인으로서 교회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담대하게 우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권면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혹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장막(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쫓겨날까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지는 않은가? 아직도 종(노예)처럼, 일한 만큼 하나님의 (구원의) 복을 누린다고 생각하지는 않은가? 우리는 이삭인데도, 아직 이스마엘처럼 생각하며 행하지는 않은가? 우리는 신중하게 자신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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