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음주"
한국교회를 넘어, 세계 교회들은 금주 문화를 형성하는 추세이다. 모든 신자가 완전 금주를 하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안 마셔야 좋다'라는 인식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제는 한국교회만 주초를 금한다는 말도 옛말이다. 현대인들이 웰빙(Well-Being)을 강조하는 만큼, 교회도 이런 추세에 발맞추고 있으며, 특히 금연과 금주는 누구나 칭찬할 만한 좋은 교회의 문화로 볼 수 있다.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창 3:20-21)
우리의 이런 문화적 상황을 일반화하면, 자칫 성경 해석에 편견을 가질 우려가 있다. '술에 취하는 건 무조건 나쁘다.'라는 문화적 생각 때문에, 포도주를 마시는 모든 성경 인물을 성급히 단죄하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도 노아가 포도주에 취했다는 이유로, 이 사건에 모든 책임을 다 노아에게 돌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술에 취해 벌거벗는 행동을 두둔하는 건 아니다. 그의 음주가 결단코 옳다는 건 아니다. 다만 본문을 너무 '잘했느냐? 못했느냐?'라는 흑백논리로 접근해선 안 된다. 성경은 노아의 술 취함을 평가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경이 침묵하는 그 음주 자체를 평가하는 일에 몰두하기보다, 시야를 넓혀 넓은 문맥'을 보고, 그 흐름에 맞게 이 사건을 차분히 조명해야 한다.
노아의 "이름"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구약에서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름은 사람이 지어도,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의 뜻을 이루셔서, 그분의 구원 역사를 진행하신다. 예를 들어, 모세는 '물에서 건졌다'라는 뜻으로 바로의 딸이 지은 이름이었다(출 2:10).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실제로 애굽이라는 하수에서 백성들을 건지셨다. 또 '발꿈치를 잡다'라는 뜻의 야곱도 훗날에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아 그의 발꿈치를 잡는다. (그 외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꿈이나 환상, 사자 등 다양하며 직접적인 방법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계시를 주셨다.)
여기에 언급된 노아 이름의 뜻은 결단코 무시할 내용이 아니다. 특히, 우리는 이 뜻이 “안위하리라”(미완료-미래), 곧 예언적 이름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성경이 지금 노아 이야기의 시작 직전에 이름의 예언적 뜻을 말해줬으므로, 이 뜻은 노아 이야기에서 분명 어떤 식으로든 성취가 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만일,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 구절은 불필요한 내용이 된다. 그런데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에 어찌 불필요한 내용이 있겠는가?)
노아의 "안식"
노아의 이름은 앞서 본 것처럼 '땅의 저주', '안위'(안식)와의 연관성을 암시한다. 하지만 정작 노아 이야기에는 방주를 만드는 내용이 대다수이다. 즉 노아 이야기는 “물”과 관련이 깊고, “땅”과는 별로 상관이 없어보인다. 하지만 "땅” 관련된 내용이 마지막에 등장한다.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창세기 9:20
개역개정(한글성경)은 여기서 좀 의역을 했다. 사실 직역하면, “노아는 땅의 사람이 되기 시작했고, 포도원을 심었다.”이다. 직역이 어색하긴 해도, 그가 “땅의 사람”이 됐다는 표현은 앞선 '땅의 저주'를 연상하게 한다.
아마도 노아를 "땅의 사람"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창세기 5:29에 대한 언급일 것이다. 노아의 포도 농사는 확실히 위안을 가져다 주지만, 포도나무의 열매는 일종의 (선과 악이) 혼합된 축복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Gordon J. Wenham, Genesis 1–15, vol.1,198.
창세기의 앞선 내용에서는 이 저주가 두 차례 등장했었다. 먼저는 아담의 죄로 인한 땅의 저주, 다음으로는 가인의 죄로 인한 “땅의 저주”이다(창 3:18-19; 4:12). 하지만 성경을 잘 보면, 후자의 저주는 가인 본인에게만 해당이 됐으나, 전자는 전인류적인 저주였다(4:12 참고). 따라서 라멕이 말한 '땅의 저주'란 아담의 죄에서 비롯된 그 저주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담에게 내리신 '땅의 저주'가 어떤 내용인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아담의 "땅의 저주"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세기 3:17)
아담에게 내리신 그 저주로 인한 결과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땅의 저주로 '평생에 수고'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아담의 후손들은 이 저주로 인해 쉬지도 못하고, 평생 수고하면서 힘든 노동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따라서 노아의 예언적 이름의 뜻은 이 저주와 상당히 일치한다. 본래는 아담으로 인한 땅의 저주로 평생 수고해야 한다. 하지만 노아 이름의 뜻은 이 저주에서 벗어나서, 평생에 수고하지 않는 삶, 곧 '안식의 삶'을 소망한다. 그래서 노아는 정말로 이 이름의 뜻이 성취되어 안식을 누렸다.
"새 아담" 노아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창세기 9:20-21
다시금 이 구절에 주목하자! 노아는 '땅의 사람', 곧 농사꾼이 됐다. 그리고 아담의 저주에 따르면, 농사꾼 노아는 평생 힘들게 수고하며 땅의 소산을 먹어야 한다. 그런데 노아는 그렇게 힘들어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보리나 밀가루 농사도 짓지 않는다. 그는 지금 포도원을 가꾼다. 포도는 '주식'보다 '디저트'(과일)에 해당한다. 구약 시대에도 포도는 “식량”보다 '커피 한 잔의 여유', 곧 “기쁨, 안식, 평안”과 관련된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시편 4:7
그들이 그 가운데에 평안히 살면서 집을 건축하며 포도원을 만들고 그들의 사방에서 멸시하던 모든 자를 내가 심판할 때에 그들이 평안히 살며 내가 그 하나님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에스겔 28:26
지금 농사꾼 노아는 아담의 저주에서 벗어난 “새로운 아담”이다. 그는 죽도록 일하지 않아도, 포도원을 가꾸며 포도주를 즐기고 취하는 여유를 부린다. 심지어, 벌거벗는 모습은 에덴동산의 아담을 재현한다. 그는 홍수 이후 새 시대의 아담이 되었다.
저주와 축복의 결과를 낳는 노아의 술취한 이야기는 홍수 이전 세계의 언어, 특히 아담과 가인 그리고 아벨의 이야기도 상기시킨다. 우리는 홍수 이야기에서 재 실현된 창조와 에덴동산의 창설, 특히 홍수 이후 세계의 아버지, 둘째 아담으로서 노아를 묘사하기 위한 9:1-7을 보았다.
K. A. Mathews, Genesis 1-11:26,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414.
"불완전한" 노아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베드로후서 2:6
노아가 언뜻 새 아담처럼 보이긴 해도, 진정한 의미에서 그는 완전한 아담이 아니다. 이는 이어지는 다음의 구절이 잘 증언한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창세기 9:22-23
노아는 언뜻 진정한 안식을 누리는 듯했으나, (낙원에 뱀이 들어왔듯이,) 함이 노아의 장막으로 슬며시 들어와서 그 하체를 보고 아버지를 모함했다. 결국, 노아의 포도원은 언뜻 새로운 에덴동산처럼 보였으나, 그 동산은 한순간에 신기루에 불과했다.
...저자에게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구체적인 의미가 아니라 패턴 자체에 있음을 암시한다... 노아의 타락 사건의 패턴은 아담의 타락 사건의 패턴과 동일하다.
John H. Sailhamer,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Genesis–Leviticus (Revised Edition), 134–135.
함은 "아버지의 나체를 보고" 텐트 밖에서 형제들에게 말했다(22절). 함의 역할은 아담의 나체를 발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뱀(3:6, 11-13)과 그 행위로 저주받은 뱀(3:14)과 비교된다.
K. A. Mathews, Genesis 1-11:26,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418.
오늘날에 적용
오늘날 노아의 음주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노아의 포도주는 성경에서 포도주의 용례가 “기쁨, 안식”과 관련이 있음을 고려할 때, 그 자체로 잘못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노아가 벌거벗고 포도주에 취하여 자는 모습은 이제 악인의 핍박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아무런 걱정이 없이 편히 쉬는 안식을 분명히 보여준다. 하지만 노아의 포도주는 다른 한편으로 과음을 분명히 경고한다. 노아가 불완전한 새 아담이었듯이, 모든 사람은 여전히 연약하며 죄악된 본성이 내제한다. 노아도 실상 술에 취하여 죄에 쉽게 노출되고 말았다. 즉 그는 땅의 저주에서 벗어나 포도주를 마시며, 잠을 자는 여유까지 부렸지만, 그의 음주는 결국 노아의 집 안에 죄와 저주의 시발점이 됐고, 노아의 안식은 결국 무너졌다. 결국 이 사건은 결국 죄를 온전히 제거하시고, 이 땅을 진정한 낙원으로 회복하실 장차 올 메시아, 곧 예수님을 고대하도록 인도한다.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한복음 2:10-11
노아의 포도주는 '안식과 기쁨'을 의미했지만, 죄에서 완전히 해방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음료였다. 반면, 예수님의 것은 최상급 포도주, 곧 죄와 저주에서 완전히 해방된 안식과 기쁨을 허락할 음료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 땅에서 살동안 금주를 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아직은 이 땅에서 '노아의 포도주' 밖에 마실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성찬의 포도주는 예외이다.) 그것은 잠시 잠깐 안식과 기쁨만 줄 뿐이고, 조금만 과음하면 노아와 같이 죄에 침투를 허용하고 만다. 그러나, 성찬의 포도주, 또 장차 우리 예수님이 친히 따라주실 최상급 포도주는 모든 죄에서 완전히 벗어날 영원한 안식과 기쁨의 술이다. 주의 나라에서 주님이 따라주시는 그 술에 흠뻑 취할 그날을 소망하자. 그리고 지금은 좀 참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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