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는 선악과?
태초에 하나님은 만물을 "보기 좋게" 만드셨다. 하지만, 우리 눈에는 한 가지 "보기 거슬리는" 게 있다. 그것은 바로 "선악 나무"이다. 아이들은 종종 왜 만들었냐고 묻는다. 말 그대로, 안 만들면, 먹을 일도 없었다. 그러면, 애초에 뱀의 유혹도 없었을 것이고, 낙원에서 쫓겨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만들어서, 죄를 지을 여지를 주었단 말인가?
동산 "가운데"에 나무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세기 2:9-10)
대부분 에덴동산을 “평지”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어릴 적 그림책으로 그렇게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 구절을 보면, 에덴에서 강이 발원하고, 에덴동산을 거쳐서 네 갈래로 흘러간다. 즉, 물은 높은 곳에서 아래로 흐르기 때문에, 에덴동산은 당연히 “고지대”이다. 더 정확하게는 "에덴"이라는 지역에 있는 "산"에서 "중-상턱"에 위치한 정원이 "에덴동산"이다. (사실, 이에 대한 증거는 성경 곳곳에 있고, 많은 학자도 이 사실에 동의한다.) 따라서, 에덴동산은 한 마디로, "산 위에 있는 정원"이다.
모랄레스(Morales)의 그림처럼, 에덴동산은 산 위에 있는 정원이고, 그 가운데 "생명 나무"와 "선악 나무"가 있다. 여기서 "가운데"라는 표현은 단순히 "지리적 정중앙"을 뜻할 뿐 아니라, "의미상 중요한 위치"를 뜻할 때도 사용된다. (예를 들어, 성막의 언약궤)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그림과 같이 에덴동산에서 가장 높은 곳, 에덴 산 꼭대기에 근접한 지대에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걸 단순한 추측이라고 여길 수 있으나, 이에 대한 타당성은 다음의 구절로 계속 살펴볼 수 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창세기 3:6)
이 구절은 좀 난해하지만, 사실, 밑줄 부분은 원어로 “먹기에도 좋고, 보기에도 좋고”이다. 이 구절은 단순히 "먹는 것"에 대한 잘못이 아니라, "보는 것"의 문제도 지적한다. 여기서 "보기 좋다"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보시기에 좋았더라"를 연상케 한다. 즉, 하와가 선악 나무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그녀는 "피조물"의 눈이 아니라, "창조주"의 눈으로 그 나무를 보고 있다.
창세기 1장에서 "좋은 것을 보았던" 분은 분명히 하나님 혼자였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 대신, "좋은 것을 본 사람은 여자"이다.
John H. Sailhamer,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Genesis–Leviticus (Revised Edition), 2008, 1, 86
"그녀는 이전에도 그 나무를 진심으로 바라볼 수 있었지만, 먹고 싶은 욕망이 전혀 들지 않았다."
John Calvin, Commentary on the First Book of Moses Called Genesis, 1:151.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내용을 정리할 수 있다.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에덴동산에서 "가장 중요한 곳"에 있다. 즉, "가장 보기 좋은 곳"이다.
- 하와는 "먹는 것"의 문제가 발생하기 이전에, "보는 것"부터 문제가 생겼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토태로, 선악 나무를 "올바로 보는 것"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즉, 이 나무는 원래 "보는 나무"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언약)을 기억하고, 먹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잘 기억하도록 하는 “보기만 하는 나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나무는 “보기만 하는 나무”일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아담에게 주신 이 명령이 “행위 언약”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WCF. 7.2). 즉, 선악과 금지 명령은 하나님과의 “언약”이다(호 1:3 참고). 쉽게 말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약속”의 일종이다.
그러므로, 동산 중앙의 선악나무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억하도록 하는 “보이는 말씀”(성례적 나무)에 해당한다. 그들은 에덴동산에 모든 걸 마음대로 할 수 있었지만, 그 나무만큼은 먹을 수 없었다. 그들은 그 나무를 볼 때, 이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자신들을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분이 오직 하나님이심을 떠올리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에덴동산을 위임받은 왕적 존재였으나, 그 나무를 볼 때, 선악을 판단하실 진정한 왕 위에 왕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는 것이 그에게 금지된 것입니다. 이는 악이 먹는 데 있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이 말씀 안에 있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해 "외적 성례"로 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칼뱅, 창세기 설교, 159.
우리에게 주는 교훈
이제 서두로 돌아가서,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대답해주어야 할까? 만일, 주위에 펜과 종이가 있다면, 그림을 그려라! 먼저, 산을 그리고, 꼭대기에 나무를 그린 뒤, 그 나무를 보는 아담과 하와를 말이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의 다른 나무를 바라볼 때, 자신이 주인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동산 중앙의 나무를 볼 때, 하나님과의 언약을 떠올리고, 그 나무 만큼은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의 모든 것들을 주셨다. 그러나, 동산 중앙에 나무만큼은 주시지 않았다. 그들은 그 나무를 소유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 나무를 보기만 해야 했다. 그리고, 보면서 참된 지혜를 간직해야 했다. 즉, 만물의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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