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꾼 Or 믿음의 조상?
야곱은 "사기꾼"인가? "믿음의 선조"인가? 야곱의 이름은 “발꿈치를 잡다”라는 뜻으로(25:26), 창세기에서 이것은 에덴동산의 뱀을 연상시킨다(창 3:15). 실제로, 뱀은 동산의 하와를 속여서 그 에덴동산을 그들이 소유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처럼, 야곱도 에서와 이삭을 속이고 장자권을 쟁취했으며, 이후 라반의 재산까지도 빼앗았다(31:1).
분명히 야곱의 이러한 모습은 “간사한 사기꾼”이다. 하지만, 성경은 결단코 그를 정죄하지 않는다. 그에게 어떤 꾸지람이나 질책도 없다. 오히려,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야곱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창세기 28:15)
우리의 윤리적 기준으로, 야곱의 행동은 확실히 정당하지 못하다. 그의 몇 가지 행동들은 다분히 위험하다. 하지만, 성경의 기록들은 야곱을 위험인물로 간주하기보다, 도리어 믿음의 선조로 이해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흐름을 따라, 그에 대한 전체적인 기준을 설정하고, 이어서 세부사항들을 살펴야 한다. 즉, 야곱은 믿음의 선조이다. 분명 성경은 이렇게 평가한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 속에 그의 “속임수”와 부적절한 행동들을 세부적으로 살펴야 한다. 우리는 “그냥 야곱”을 보는 게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야곱”을 본다는 걸 결단코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주제로서 성경의 역사적 부분에 관한 해석은 역사적 사건들이 이야기 속에서 제시되는 방식에 따라 설명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들이 어떻게 표현되는지는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었다. 하나님은 성경이 기록된 방식대로 그 사실(fact)들이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는 의견을 가지고 계신다.
Nicolaas H. Gootjes, "Rethinking Redemptive-Historical Interpreation", Clarion, 1990.
야곱 이야기의 발단: 하나님의 약속
사실, 우리가 야곱을 떠올릴 때, “팥죽 한 그릇”, “속임수”. “여호와의 사자와의 씨름” 사건들을 각기 파편적으로 떠올리곤 한다. 마치, 이 사건들이 서로 연관성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속임수”의 사건을 읽고는 “우리도 남을 속이지 말자.”, 또 “씨름” 사건을 읽고서는 “우리도 하나님과 기도로 씨름하자.”라는 식의 각기 독립적인 교훈을 얻어낸다. 즉, 이 사건들이 야곱이라는 한 사람을 통해 일어났음에도, 서로 아무런 연결성이 없게 해석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야곱의 모든 사건은 근본적인 하나의 토대 위에서 모두 일어나고 있다. 마치, 나무의 수많은 가지가 한 뿌리로부터 시작하여, 지속적으로 영양을 공급받듯이 말이다. 즉, 야곱의 일생에서 뿌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창세기 25:23)
하나님께서는 태중에 있을 때부터 야곱을 택하셨다. 즉, 야곱은 이삭과 같이 하나님께서 언약적 복을 주시기로 약속한 장자, 곧 택함을 받은 자손이다.
주께서 창세기 12:2–3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이어지는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처럼, 이 계시는 야곱이 에서와 뱃 속에서 다투는 것과 나중에 그가 장자권을 획득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의 발판을 마련한다.
Sidney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Genesis: Foundations for Expository Sermons, (Grand Rapids, MI; Cambridge, U.K.: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07), 247.
"약속"과 "현실"의 갈등
야곱의 모든 사건은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이 가로막힌 듯 보이는 “현실”과의 갈등을 반영하고 있다. 즉, 약속된 장자는 “야곱”이지만, 현실적으로 장자는 “에서”이다. 또한, 약속의 땅은 “가나안 땅”이지만, 현실적으로 라반은 하란에서 그를 내보내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야곱의 모든 사건은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과 “현실” 사이에 갈등을 반영할 뿐 아니라, 그는 타인의 발목을 잡는 “속임”으로 “현실”을 계속 극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야곱의 브니엘에서의 “씨름”은 “현실”을 “속임수”로 극복하는 이 패턴에 큰 변화를 보여준다. 당시에도 하나님의 약속은 “가나안 땅”이다. 반면, 현실적으로 그 땅에는 “에서”가 있다. 심지어, “에서”는 군대를 이끌고 자신에게 오고 있다. 여기서 야곱은 이런 “현실”을 극복하려고 “예물”을 보내는 기교를 부린다. 하지만, 그는 결국 “현실”을 다른 수단으로 극복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으로 극복한다. 그것이 바로 “브니엘의 씨름”이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현실”상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상으로 야곱은 아직 죽을 수 없다. 즉, 브니엘의 씨름은 현실을 과감히 내려놓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든 야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여기서 “속임수”로 타인의 발목을 붙잡지 않았으며, 그 대신 “하나님의 약속”, 곧 하나님의 발목을 붙들었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은 일생 하나님의 “약속”을 얻기 위해 “현실”과 다투던 인물이다. 그는 “현실”에 해당하는 “에서”, “라반”의 발목을 잡았고, 속임과 기교로 그들과 겨루었다. 하지만, 참된 승리는 결국 속임과 기교에 있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발목을 붙잡으며, 그 약속을 온전히 신뢰함에 있었다. 따라서, 야곱은 이제 발목을 잡는 야곱이 아닌, “현실”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이 되었다.
(To Be Cou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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