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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의 구속사

만나와 베델리엄 (출 16장)
아티클/(구속사적) 물건 신학

만나와 베델리엄 (출 16장)

2021. 7. 28. 22:47

 

 

베델리엄 같은 만나

 

오늘날에 만나(Manna)를 직접 만들어 볼 수 있을까? 성경에 따르면, 만나는 “깟씨” 같고, 모양은 “진주” 같으며, 색깔은 “하얗고”, 맛은 “꿀 섞은 과자”와 같다(cf. 출 16:31). 물론 이 정보로 대략적인 생김새를 그려볼 수 있다. 하지만 만일 “만나”를 실제로 제조하려고 하면, 오늘날 현대인들이 그토록 따지는 정확한 “식품 성분”의 정보가 필요하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까지 친절하지는 않다. 어쩌면 성경이 그저 오래된 책이라서, 오늘날 현대 서적과 같이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성경을 반복해서 읽어보고 잘 곱씹어보면, 성경은 더 아름다운 다른 방식의 '만나 제조법'을 가르친다.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민 11:7)

 

 

   한글 성경(개역개정)이 여기서 언급하는 “진주”는 원어로 “베돌라”(bedolah), 영어로의 음역은 “베델리엄”(bdellium)이다. 이걸 “진주”로 의역했으나, 원어로 “베델리엄”이 오늘날의 어떤 보석을 뜻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흥미롭게도, 모세는 "만나"의 모양을 설명하려고 “베델리엄”에 빗대는데, 문제는 “베델리엄”을 그 누구도 모른다는 것이다! 

 

 

시내 산에 대한 현대 여행가들은 성경의 만나를 오늘날에도 여전히 발견될 수 있는 물질로 동일시하려고 노력해왔다... 현대적 '만나들' 중에 성경의 재료에 대한 서술과 정확히 일치하는 건 없었다.

 Gordon J. Wenham, Numbers: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121–122.

 

 

 

 

에덴에만 있었던 베델리엄

 

성경에서 “베델리엄”을 추적하면, 독특한 사실을 한 가지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민수기 외에 베델리엄이 다음의 구절에서 딱 한 번만 언급된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언급되는 구절은 아래와 같다.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 2:12)

 

창세기에 따르면, “에덴”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라는 두 보석이 있다. 여기서 호마노는 그래도 “홍옥수”(Carnelian)로 이스라엘이 제사장의 흉패로 사용했던 보석이다(출 35:9; 27). 물론 흔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모든 백성은 성막에서 제사장을 만나기 때문에, 최소한 이게 어떤 보석인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베델리엄"만큼은 묘하게도 성막에서 어떤 기물로도 사용되지 않는다. 아니! 성경 전체에서 아예 나타나지 않는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도 “베델리엄”을 본 적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베델리엄과 같다는 설명은 만나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결국 베델리엄은 에덴에만 있던 보석같은데, 그곳은 오로지 아담과 하와만 살았으므로, 그들을 제외하고 베델리엄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베델리엄(BDELLIUM): bedollach의 번역, 불확실한 뜻의 단어이다. 그것은 고무(gum), 송진(resin), 진주(pearl), 돌(stone)로 동일시되기도 했다...

had Brand, Charles Draper, Archie England, Steve Bond, E. Ray Clendenen, and Trent C. Butler, Eds., Holman Illustrated Bible Dictionary, 177.

 

 

만나를 받은 '전후 문맥'

 

왜 모세는 만나를 자신도 본 적이 없는 “베델리엄”에 빗대어 설명할까? 추후 성경을 읽을 후대에게 “모르는 것”(만나)을 설명하려고, 또 “모르는 것”(베델리엄)을 제시하는 건, 정말 어불성설(語不成說) 아닐까? 그런데 데이빗 칠톤(David Chilton)은 이런 모세의 설명이 품은 의도에 흥미로운 견해를 제시한다. 따라서 그의 견해로 이 주제를 생각해보기 위해, 만나를 최초로 받은 16장의 전후 문맥을 살펴보도록 하자.

 

 

 

만나를 먹기 이전: 수르 광야

 

출애굽기에서 만나를 먹기 직전 지역은 '수르 광야'이다(출 15:22-27). 이 문맥에서 언급된 말씀들을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다.

 

 

'물을 얻지 못함'(22) →  '물을 발견하지만, 써서 못 마심'(23) → '백성의 원망'(24)

→ '나무로 물을 달게 하심'(25) → '치료하는 여호와'(26) → '우물 12개와 종려나무 70그루'(27)

 

 

여기서 말이 안 되는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질병을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26)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치료는 이미 걸린 질병을 고치는 것이지, 질병에 처음부터 안 걸리도록 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질병을 안 준다고 하시면서, “치료하는 여호와”로 자신을 소개하신다. 26절만을 보면, 이 표현은 분명 모순이다.

 

 한편, 이 문맥 전체를 고려하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 문맥의 서두는 물이 아예 없는 수르 광야에서 시작한다(22). 말미는 열두 우물과 칠십 그루의 종려나무가 있는 엘림으로 끝난다(27). 또, 중반부에서 백성들은 쓴 물을 발견하고(23), 하나님께서 그 물을 달게 바꾸신다(25). 즉 “치료하시는 여호와”는 '수르 광야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에 근거를 둔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쓴 물 → 단물"(25-26)로 치료하시고, 또 "메마른 광야 → 오아시스"(22, 27)로 인도하심으로, 그분 자신을 "치료자"로 소개하시는 것이다!

 

 

바로 왕보다 여호와를 섬기는 삶을 시작했을 때, 그들은 치유와 건강이 필요했다. 안전한 식수의 염려에 대해, 주님은 마라의 쓴 물을 치료하시는 것으로 보이셨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엘림의 치유하는 오아시스로 데려가셨고 그곳에는 12개의 우물과 70그루의 종류나무가 있었고, 그들은 물가에 진을 쳤다. 그 텍스트는 요즘 치료하신(repair) 일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James K. Bruckner, Exodus, 145–146.

 

 

만나를 먹은 이후: 르비딤

 

이번에는 만나를 먹은 이후 문맥을 살펴보자. 백성들은 만나를 최초로 받았던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에 도착한다(17:1). 여기서도 참 기묘하게 백성들은 또 마실 물이 없다.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고(2-3), 모세는 여호와께 부르짖는다(4). 그리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17:5-6)

 

 

여기서 하나님의 방식은 ‘만나를 먹기 이전’(수르 광야, 15장)과 전혀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반석의 물을 마시도록 하신다. 물론 이 구절은 생각할 점이 많지만, 주목할 부분은 “호렙 산”이라는 장소이다. 백성들은 아마도 산 밑에 기다렸고, 산에는 모세와 장로들만이 올라가 반석을 쳤을 것이다. 거기서 샘솟는 물이 "강물"이 될 때, 밑에 있는 백성들과 짐승들이 그 물을 충분히 마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지팡이로, 그는 거대한 돌이나 바위를 쳤다. 그가 그렇게 할 때, 이스라엘 민족에게 충분한 물이 나오게 된다. 이것은 저자(모세)에 의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암시된다...

T. Desmond Alexander, Exodus, Vol.2, 334.

 

 

 

 

낙원을 보여주는 만나

 

 

전후 문맥을 모두 보았으므로, 이제 ‘만나 사건’(16장)을 살펴보자. 만나는 “수르 광야”를 지나, “신 광야”(16:1)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문맥에서 독특한 말씀을 보게 된다.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출 16:7)

 

과연 만나는 그냥 생존을 위한 음식에 불과할까? 모세와 아론은 만나를 통해 여호와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말한다. 백성들은 만나를 보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 그들이 봤던 영광이 정확히 무엇인지, 성경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까지 봤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때, 이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문맥 출 15장 출 16장 출 17장
장소 수르 광야 신 광야 르비딤
사건 '쓴물'에서 '단물', '광야'에서 '오아시스' 만나( 또 메추라기) 산에서 흐르는 강물

 

먼저 광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꾼다. 또 광야에 “만나”가 하늘에서 내림으로 하얗게 덮는다(16:31). 이어서, 광야에 호렙 산에서 물의 근원이 발원하고, 여기서 강물이 흘러내린다(17장). 이런 흐름을 잘 생각해보라! “광야”가 “낙원”으로 치료되는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은가? 

 

 

모세가 만나를 “베델리엄”으로 묘사하는지, 그 이유를 자세히 생각해 보자. 모세는 광야에서 “쓴 물”이 “단물”로 치료되고(15장), 또 산에서 강물이 물줄기가 되어 흘러내리며(17장), 또 광야를 아침마다 하얗게 덮는 만나를 보면서(16장), 여호와의 동산을 떠올렸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직접 보지 못한 “베델리엄”과 같다고 만나를 묘사한 것이다.그는 이 모든 이적을 통해, 당시 ‘메마른 광야’를 친히 ‘에덴의 낙원’으로 회복하시는 하나님, 곧 “치료하시는 여호와”를 몸소 경험했던 것이다. (사무엘상이 신 광야를 "하윌라 땅"이라고 명명하는 장면이 이를 더 분명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처음 경험한 그 땅에서 회복되는 에덴동산의 모습을 경험했다) 

 

 

 

 

 

"생명의 떡"이시며, "낙원"을 완성하실 예수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광야에서 백성들에게 “물”과 “만나”를 계속해서 공급하셨다. 이러한 물과 만나는 친히 낙원으로 치료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을 잘 반영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을 참된 낙원으로 인도한 건 않았다. 백성들은 매일 같이 “물”과 “만나”, 심지어 “회막”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았고, 결국 광야의 1세대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민 14:30). 모세와 아론조차도 므리바에서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같은 처분을 받았다(민 20:24). “만나”는 “베델리엄”과 비슷했지만, 말 그대로 “베델리엄” 자체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 봤던 광야의 풍경은 진짜 “에덴 동산”이 아니다. 단지, 그들은 광야에 “만나”를 내리시고, “물”을 내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낙원을 회복하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을 뿐이다. 아직, 그들에게 참된 낙원은 완성되지 않았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 6:58-59)

 

 

결국 진정한 낙원의 회복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다. 그리스도께서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사는 성도들에게 “생명수”가 되어주시고, “생명의 떡”이 되어주신다. 모든 성도는 이렇게 주 안에서 이 시대의 낙원을 살짝 맛보게 된다. 그리고 장차 주께서 다시 오실 때, 그때는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낙원이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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