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 24:26-27)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두 제자는 엠마오로 떠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23-24). 심지어 예수님이 눈앞에 오셨음에도(15), 그들은 눈이 어두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16). 두 제자의 마음 속에서 예수님은 부활에 실패했다. 그들의 마음속 예수님은 여전히 “무덤에 누인 시체”였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두 제자를 내버리지 않으셨다. 친히 그들을 찾아가셨고, 어두워진 눈과 마음을 밝혀주셨다. 무엇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밝히셨을까? “모든 성경”을 통해서이다. 예수님은 모든 성경으로 자기에 관한 말씀들을 상세히 설교하셨고(27), 이렇게 성경을 풀어주시자 제자들의 마음은 뜨거워졌다(32). 그리고 그들의 눈과 마음은 밝혀져, 예수님을 비로소 알아보게 되었다(31).
두 제자의 이런 모습에서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비춰준다. 한 주간 세상을 살며, 우리의 마음은 어두워진다. 예수님을 “죽은 자”처럼 여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여도, 실제로 예수님께서 함께 하심에도, 우리는 예수님을 마치 없는 자(죽은 자)로 간주하며 잊고 살아간다. 그러나 매주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는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지금도 살아계시며 함께하심을 상기시킨다. 주일날 예배당에 들어올 때는 예수님을 잊고 망각한 자였다. 그러나 설교를 듣고 예배당을 나갈 때는 예수님의 살아계심과 동행하심을 확신한다.
때때로 설교자들은 극심한 무능함에 사로잡힌다. 성도들은 많은 어려움을 호소하지만, 설교자는 그들을 도울 “돈”, “인맥”, 또 병을 고칠 “의학적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현실적으로 성도를 그닥 도울 능력이 없다. 사역을 지속할수록, 설교자는 이런 무능감이 휩싸인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설교자는 무능하다.
설교자는 이렇게 세상에 대해 “무능자”일지라도, 그는 설교단에 올라가 세상 역사상 “가장 유능하며 위대하신 한 분”을 소개할 수 있다. 설교자가 “무능”하기에, 그는 성도들이 “절대적으로 유능”하신 그분께 눈을 돌리도록 해야 한다. 성도들의 영적 눈이 설교자가 아닌 하늘 위에 유능하신 그분을 바라보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분이 누구인가? 위대하신 전능의 유능자 예수님이시다.
설교는 그야말로 신성한 “맞선”의 시간이다. 예수님을 망각한 성도가 다시 그분을 떠올리고 그 심령이 소생하여, 위대한 전능자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회복하는 시간이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모든 성경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점화(點火)하시고, 자기를 깨닫도록 하셨다. 이처럼 설교자도 성도들에게 예수님을 정확하고, 올바르게 정성껏 잘 소개하여, 그들의 마음속에 “죽어버린 예수님”을 “살아계신 예수님”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께 소망을 두도록 해야 한다. 설교자가 성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예수님”이다. 이것이 세상에서 무능하고 연약한 설교자가 성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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